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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자료 현대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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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형평운동 사적지 진주 형평운동 사적지 진주 형평운동 사적지 진주 형평운동 사적지 진주 형평운동 사적지 2020년대 진주 형평운동 사적지 형평운동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을 말한다. 1923년 4월, 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했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차별이 여전했다. 이에 백정 출신들은 사회적 차별을 해소할 것을 요구했는데, 여기에 개화 양반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올해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경상남도 진주시는 형평운동의 발현지로 알려져 있다.

1923년 형평사 창립대회에 참여하여 형평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끈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의 묘소, 1996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맞춰 세워진 형평운동 기념탑, 망진산 봉수대에 세워진 신현수 선생의 송공비, 형평사 창립대회가 열렸던 옛 진주청년회관 자리로 추정되는 진주YMCA, 형평사 창립축하식을 거행한 진주극장(옛 진주좌)과 극장 앞에 설치된 형평운동 기념조형물,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를 올린 진주교회, 1919년 3월 18일 진주 기미독립만세 의거를 기념하기 위한 진주 기미독립만세 의거 기념종탑 등 현재 진주시에 있는 형평운동 사적지를 기록하였다.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1950년대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소 막사를 집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 지역에 소 막사가 들어선 것은 1909년 수출우검역소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수출우검역소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면서 이출우검역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당시 일제는 소 수탈을 위해 우암동에 소 막사를 대거 증축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는 소의 70%가 이곳의 소 막사를 거쳐 갔다. 우암동에는 2,500마리의 소를 수용할 수 있는 19동의 소 막사가 있었다.
소막마을이 생긴 것은 1945년 해방이 되어 귀환한 사람들이 소 막사에 거주하면서부터였다. 특히 6·25전쟁 당시에 많은 피란민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소 막사 주변에도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밀집된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소막마을은 6·25전쟁 후에는 인근의 항만과 공장의 노동자들이 거주하던 생활공간이었다. 이처럼 소막마을 주택은 일제강점기 소 수탈을 위한 소 막사에서 6·25전쟁 때 피난민 임시주거지로 용도가 바뀌었다.
소막마을은 시간이 멈춘 장소 같다. 지금도 소 막사를 개조하여 지은 집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집집마다 화장실을 둘 수 없던 탓에 여기저기에 공동화장실이 남아 있다. 얼마나 집이 닥지닥지 붙었는지 마을의 골목은 아주 비좁고 미로와 같이 이어진다. 이처럼 소막마을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부산광역시는 2019년 현재 우암동 소막마을을 ‘피란생활 역사문화마을’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소 막사·6·25전쟁 때의 피란민 주거지·산업화 과정의 생활공간이 함께 녹아있는 소막마을은 한국 근현대사 체험의 장소로 그 가치가 크다. 소막마을 주택 1동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등록문화재 제715호로 지정되었다.

부산 구 성지곡수원지 부산 구 성지곡수원지 부산 구 성지곡수원지 부산 구 성지곡수원지 부산 구 성지곡수원지 개항~대한제국(1910) 부산 구 성지곡수원지 성지곡수원지는 부산 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한 근대적 상수도 시설이다. 이 수원지는 1908년 준공된 서울의 뚝도수원지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졌다. 성지곡수원지는 1907년 착공하여 1909년 준공되었다. 이 수원지는 대한제국과 부산의 일본 거류민단이 공동으로 자금을 부담하여 지었다. 지금도 ‘隆熙三年 竣工(융희3년 준공)’이라는 초석과 함께 건설에 참여한 일본인 기술자의 이름이 영문으로 새겨진 표석이 남아있다.
성지곡수원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중력식 콘크리트 댐이다. 수원지 댐과 침전지 댐 모두 콘크리트에 거칠게 다듬은 석재를 붙여 마감하였다. 물에 접하는 안쪽은 수직에 가깝고, 반대쪽은 아래가 넓고 위로 올라가면서 체감되는 형태이다. 제방의 길이는 112m, 높이는 28m로 저수량은 61만 톤에 이른다. 수원지를 착공할 때 부산의 인구가 4만 명 정도였는데 30만 명이 마실 수 있도록 여유 있게 댐을 만들었다. 성지곡수원지는 1972년 낙동강 상수도 공사가 완료되어 1985년부터 용수 공급이 중단되었다.
성지곡수원지는 수돗물을 정제하는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마치 상수도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거미줄 같은 사방 수로(砂防水路)를 따라 물을 모으는 저수지 댐, 토사 등을 침전시키는 침전지 댐, 깨끗하게 정수된 물을 여과지로 운반하는 일체가 보존되어 있다. 특히 저수지의 물이 일정량을 넘을 때 이 물을 빼내는 여수로를 만들어 하류의 농민에게 물을 공급하였는데, 이는 이 시기에 건설된 영국식 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수돗물을 공급하던 수원지는 이제 호수로 남아 있다. 경관이 좋은 수원지 일대는 부산 어린이대공원에 편입되어 부산 시민의 안식처가 되었다. 성지곡수원지 둘레길은 이기대 둘레길과 함께 부산을 대표하는 둘레길이다. 원형이 잘 보존된 성지곡수원지는 2008년 등록문화재 제376호로 지정되었다.

통영 황리공소 통영 황리공소 통영 황리공소 통영 황리공소 통영 황리공소 일제강점기(1910~1945) 통영 황리공소 통영 황리공소는 통영 지역 최초의 공소이다. 공소는 본당보다 작은 성당으로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나 구역을 말한다. 황리 지역은 지리적 특성으로 뱃길을 통한 교역 중심지로 발달하였고, 자연스레 1860년대 무렵에 천주교도 전파되어 교우촌이 세워지고 1893년 황리공소가 설립되었다.
당시 고성 지역에는 여러 공소가 있었지만 황리와 기월리 공소가 규모가 큰 편이었다. 특히 포구에 위치한 황리공소는 지리적 장점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경상남도 해안 지역 천주교 거점으로 발전하였다. 1934년에는 현재와 같은 한옥의 황리공소가 지어졌다. 이듬해인 1935년에는 공소에서 신부가 파견되는 본당으로 승격하여, 고성 지역 천주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황리본당의 초대 신부로는 순교자 신석복의 손자인 신순균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황리본당의 교세는 약해졌다. 뱃길에 의존하던 기존의 교통로가 자동차와 같은 육로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거기에 고성 지역 신자들도 마산교구에 신부 파견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다. 1939년 기월리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자 황리본당은 다시 황리공소로 격하되었다. 황리공소는 행정구역상으로 통영이지만 마산교구 고성본당 소속이 된 것이다.
현재의 황리공소는 1934년 지어진 건물이다. 산자락 아래 평야 지대에 위치한 황리공소는 정면 6칸 측면 3칸 건물로 팔작지붕 양식이다. 성모상과 종탑이 있는 황리 공소의 외관은 일반 시골집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아담한 실내에는 키 낮은 들보와 서까래가 공소가 지어진 지 80년이 지난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2019년 현재 황리공소에서는 둘째·넷째 주일 오후 3시에 미사를, 첫째·셋째·다섯째 주일 10시에는 공소예절을 드리고 있다.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황리공소는 2018년 등록문화재 제734호로 지정되었다.

창원 성요셉성당 창원 성요셉성당 창원 성요셉성당 창원 성요셉성당 창원 성요셉성당 일제강점기(1910~1945) 창원 성요셉성당 창원의 성요셉성당은 경상남도 최초의 석조로 지은 천주교 성당이다. 성요셉성당의 토대를 세운 것은 프랑스 에밀리오 신부였다. 에밀리오 신부는 진주에 있던 본당을 마산포로 이전하였다. 1898년 개항한 마산포가 교역의 중심지로 천주교 전파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성당 터에 작은 집 몇 채를 마련하여 1900년 마산포성당(현 완월본당)을 건립하였다. 현재의 성요셉성당이다. 그 후 1928년 유리오 베르문 신부는 천주교 마산 교구의 완월동 본당인 성요셉성당을 착공한 후 1931년 성당과 제대 공사를 마치고 1932년 축성식을 하였다.
성요셉성당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과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조합한 석조 건축물이다. 길이 21.5m 폭 8.8m 규모로 화강암을 네모지게 다듬어 여러 단으로 외벽을 쌓았다. 출입구는 입구에 3곳, 좌우 측 양쪽에 각각 1곳씩 있다. 좌우 측 상단에는 각각 7곳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어 채광과 멋스러움을 더했다. 창건할 때 만든 석조 제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아담한 실내는 어떤 성당보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성요셉성당은 현재 창원 성지여자중고등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 학교는 1910년 무쎄 신부에 의해 설립된 학교이다. 성지학교가 세워진 1910년대부터 성요셉성당은 학교와 함께 존립하였다. 당시에는 수녀원 건물도 성당과 나란히 있었다. 하지만 1975년 성당을 현 완월 본당으로 신축 이전하여 현재는 다른 학교 건물에 둘러싸인 채 옛 건물만 남아있다. 성요셉성당은 오랜 역사성과 건축미로 2000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3호 지정되었다.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 윤이상 기념관 1960년대 통영 윤이상 기념관 통영시 도천동에 위치한 윤이상기념관은 동서양을 잇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0년 개관했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성장한 윤이상은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배웠으며, 귀국 후 교사로 재직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959년 독일 베를린음악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는 쇤베르크 12음계 기법과 우리나라 궁중음악을 결합시킨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며 세계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서독으로 추방된 윤이상은
1971년 독일에 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하여 음악활동을 꾸준히 이어 나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심청’, ‘나비의 미망인’ 등 4편의 오페라와 20여 편의 관현악곡, 40여 편의 실내악곡 등 총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하동 최참판댁 하동 최참판댁 하동 최참판댁 하동 최참판댁 하동 최참판댁 일제강점기(1910~1945) 하동 최참판댁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최참판댁은 대하소설 『토지』의 주 무대가 되었던 전통 가옥을 구현한 곳이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는 평사리의 대지주인 최참판댁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 계층을 아우르는 인물들에 대한 장대한 서사를 보여줌으로써 한 많은 한국 근현대사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배경지인 평사리는 지리산의 형제봉과 구재봉 사이에 펼쳐진 너른 들판과 섬진강을 끼고 있다. 하동군은 1998년부터 한옥 14동의 최참판댁과 드라마 토지오픈세트장, 박경리 문학관, 전통한옥체험관 등 토지민속 문학마을을 조성했다. 또한 2001년부터는 매년 10월 둘째 주마다 토지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토지문학제는 초등부부터 일반인까지 참여할 수 있는 ‘토지백일장’, 6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 어르신 백일장’ 등 40여개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외고산 옹기마을 외고산 옹기마을 외고산 옹기마을 외고산 옹기마을 외고산 옹기마을 광복~1950년대 외고산 옹기마을 외고산 옹기마을은 6·25전쟁 이후 전국의 옹기 장인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로 우리나라 최대의 옹기 생산마을이다. 구전에 의하면 현 남창고등학교 부근에 1910년까지 옹기굴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생산되는 옹기 원료인 점토의 분이 우수하며 가마터를 짓기 위한 지형조건이 타 지역에 비해 우수한 편이라 옹기마을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현재의 마을이 형성된 시초는 옹기장인 허덕만이 1950년대 영덕에서 이곳 외고산으로 옮겨오면서부터이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옹기장인과 도공들이 모여 옹기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후 1960년대는 전국 옹기의 70%를 공급하였으며 미국 하와이로도 수출을 하였다. 그 뒤 일본 수출의 활로를 열어 옹기의 상품성을 인정받았다. 1980년대 이후 산업화와 함께 옹기 수요의 부족과 옹기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지면서 최근에는 40여 가구 정도만이 옹기업에 종사하고 있다. 외고산 옹기마을에는 옹기를 빚고 굽는 모든 과정을 볼 수 있으며 옹기제작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옹기박물관에는 기네스 인증을 받은 높이가 221cm에 달하는 세계 최대 옹기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2010년 울산에서 열린 ‘울산세계옹기문화엑스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회는 옹기 제작 기술과 가마의 활용 등을 고려하여 울주외고산옹기협회를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4호로 등록되었다. 또한 옹기장 중에서 장성우 등 7인에 대하여 장인으로 지정하였다.

10.16부마민주항쟁탑 10.16부마민주항쟁탑 10.16부마민주항쟁탑 10.16부마민주항쟁탑 10.16부마민주항쟁탑 1970년대 10.16부마민주항쟁탑 10.16부마민주항쟁탑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견인한 부마민주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부산대학교에 건립한 탑이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부산·마산 시민들이 전개한 반독재 민주화 항쟁이다. 1979년 8월에 YH사건이 발생하고 10월에는 당시 신민당 대표인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자 10월 16일 부산대에서 학생 5,000여 명이 유신철폐, 정치 탄압 중단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가 시민의 합세로 확산되자 10월 18일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했으며 20일에는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10·16부마민중항쟁탑은 부산대 총학생회가 1985년에 개최한 ‘효원대동제’의 수익금으로 시작해 이후 조성된 기금으로 1988년 11월 18일 제2도서관 뜰에 건립되었다. 이 탑은 장방형의 130×50㎝ 크기의 석조 좌대 위에 횃불을 형상화한 길이 90㎝, 높이 220㎝의 청동 조형물로 탑에 새겨진 노랫말에서 당시 민주주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 노무현 대통령 생가 노무현 대통령 생가 노무현 대통령 생가 노무현 대통령 생가 광복~1950년대 노무현 대통령 생가 노무현 생가는 노무현 대통령이 1946년 9월 태어나 8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1946~2009)의 생가가 위치한 진영 봉하마을은 읍에서 동쪽으로 4.5km 떨어진 봉화산 아래에 있 진영단감과 벼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봉하마을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해 부산으로 이사한 1975년까지 생가를 포함해 4군데에서 살았으며, 대통령에서 퇴임한 후에 ‘시민 노무현’으로 생을 마감한 곳도 이곳이다. 노무현 생가는 대통령 지인이 터를 매입하고 김해시에 기부하여, 본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2009년 복원해 놓았다. 집 내부는 본채와 아래채, 부엌이 일렬로 늘어선 슬레이트 지붕의 벽돌집이다. 안에는 옛날 집기들과 사진들이 비치되었다. 생가 옆에는 대통령을 추억할 수 있는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다. 생가와 인접한 대통령 사저는 ‘지붕 낮은 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뒷산을 따라 지붕을 우뚝 세우지 않고 낮게 지어졌다. 사저는 2016년 5월 처음으로 일반 관람객에게 개방하였다.

김영삼 대통령 생가 김영삼 대통령 생가 김영삼 대통령 생가 김영삼 대통령 생가 김영삼 대통령 생가 일제강점기(1910~1945) 김영삼 대통령 생가 김영삼(1927∼2015) 전 대통령의 생가는 대계(大鷄)마을이라고 하는 바다 옆 작은 포구에 있다. 마을의 모양이 닭을 닮았다고 하여 장닭의 정기가 서렸다고 하는 이곳 갯마을에서, 제14대 김영삼 전 대통령(1993∼1998 재임)이 태어나 13세까지 거주하였다. 이후 1951년 손명순 여사와 결혼한 후 이곳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기존의 생가는 1893년에 건축된 목조 기와 건물이었다. 노후된 까닭에 부친이 거제시에 토지와 건물을 기증하여, 시가 2001년도에 5억의 예산으로 현 한옥 기와집인 생가를 중건하였다. 생가는 부지 536㎡로, 팔작지붕의 본채와 사랑채, 사주문·돌담으로 이루어졌다. 생가 건너편 왼쪽 능선에 부친 김홍조 옹과 모친 박부연 여사의 묘가 있다. 이외에 기념품 판매장소를 비롯해 주차시설과 화장실이 있다. 앞마당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흉상과 본채 마루에는 대통령 내외의 사진이 걸려있다. 방에는 대통령이 1996년 8월에 쓴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액자, 건물 준공식, 소학교 시절, 중학교 3학년, 단식 장면, 대통령이 되어 꽃다발을 받은 장면 사진 등이 걸려있다. 생가 옆에는 2010년 5월 개관한 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이 있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의 모습을 비롯해 1954년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9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모습, 군사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던 사진과 영상 자료가 있다.  2층 입구에 전시된 1992년 대선 당시 투표상황과 각 후보들의 포스터,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사진 등을 통해 그 시절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재임 시절 주요 치적으로 꼽히는 금융실명제 시행 기자회견 모습과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장면 등을 담은 모형을 설치하여 당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1970년대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는 거제도 옥포만에 건립된 조선소로 상선, 플랜트, 특수선박 등을 건조한다.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의 기원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일 전쟁 직전 미츠비시중공업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합작으로 부산에 조선중공업을 설립하였다. 광복 후 조선중공업은 정부가 인수하여 대한조선공사로 출범하였는데 1968년 극동해운에 불하되어 민영화되었다. 국동해운은 1973년 거제도 옥포에 수출용 대형 유조선 건조를 목적으로 100만톤급 규모의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오일쇼크 등 조선 업계의 불황으로 거제도 옥포조선소는 대우조선에 인수되었다. 대우조선은 1978년 창립식을 가진 후 골리앗 크레인을 비롯한 핵심설비를 갖추고 1981년에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옥포조선소 종합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1983년 제2도크 준공, 같은 해 11월에 ‘5억불 수출의 탑’ 수상, 1994년 대우중공업 합병, 2000년에 대우중공업 3개로 분리 등의 변화를 거쳐 2002년부터 현재의 명칭인 대우조선해양으로 바뀌었다.

경남대학교 10.18 발원지 경남대학교 10.18 발원지 경남대학교 10.18 발원지 경남대학교 10.18 발원지 경남대학교 10.18 발원지 1970년대 경남대학교 10.18 발원지 경남대학교 10·18 발원지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인 부마항쟁이 1979년 10월 부산에서 비롯되어 마산(현 창원)에서도 그 열망을 이어받았음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당시의 정국은 YH여공들의 농성과 강제 해산,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등으로 인하여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런 와중에 1979년 10월 16일과 17일 부산에서의 반독재 민주화 시위로 인하여 18일 0시에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속에서 10월 18일 10·18항쟁이 경남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며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에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마산 전 지역으로 민주화 열기가 퍼져 나갔다. 정부는 10월 20일 마산 일원에 위수령을 발표하고 계엄군을 투입하면서 시민 학생 1,563명이 연행돼 그 중 20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6일 후인 10월 26일 10·26사태로 유신정권은 종말을 맞았다. 이 사건을 기념하여 경남대학교는 시위가 시작되었던 곳을 ‘10·18 광장’이라고 명명하고 10·18기념 마라톤대회 등 해마다 크고 작은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광장은 조그만 연못인 월영지 바로 위쪽에 붙어있다. 근처에는 경남대 ‘동문 공동체’가 2009년 건립한 ‘시원석’이 있는데, “3·15 민주정신으로 일어난 10·18 부마민주항쟁의 그 날을 기억하며”라는 글자가 새겨 있다. 본관 옆 큰 나무 밑에는 부마항쟁과 관련된 기념물이 있다. 2개의 장승이 있는데 하나는 4·19운동을 기념한 ‘3·15 지킴이’라 하고 또 다른 하나가 ‘10·18 지킴이’라고 적혀 있다.
경남대학교에서 시작된 10·18항쟁은 유신독재를 끝내고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견인한 의의가 있다.

남해대교 남해대교 남해대교 남해대교 남해대교 일제강점기(1910~1945) 남해대교 남해대교는 우리나라에서 건설된 최초의 현수교로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와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를 잇는 다리이다. 남해대교는 1968년 5월에 착공하여 1973년 7월에 준공·개통했다. 중앙경간 404m, 양측경간 128m의 3경간으로 구성된 현수교로 다리 높이는 총52m, 해상높이는 25m이다. 남해대교는 완도·강화·안면·거제도에 이어 다섯 번째로 완성된 연륙교이기도 하다. 남해대교가 건설됨에 따라 부근 지역인 부산, 여수, 창원 등과의 연결이 한층 원활하게 되었으며 아름다운 야경 등의 경관으로 관광객 유치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한편 남해대교의 물동량이 크게 늘자 남해대교와 550m 떨어진 곳에 제2남해대교인 노량대교를 건설해 2018년 9월에 개통했다.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광복~1950년대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거제포로수용소는 유엔군이 1951년 1월 북한군의 전쟁포로가 증가하여 더 이상 관리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설치한 포로수용소이다. 전쟁초기부터 포로수용소 문제가 대두되고 있었다. 특히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부터는 포로 처리에 대한 문제가 더욱 부각되기 시작했다. 유엔군은 포로들을 전시 작전에 부담이 없는 곳으로 재배치할 방안을 강구한 끝에 거제도에 격리 수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유엔군은 고현, 수월, 양정, 상동, 용산, 해명, 저산지구를 중심으로 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여러 곳에 분산 수용된 포로들을 거제포로수용소로 이송하여, 이곳에 1951년 6월 말까지 인민군 포로 15만, 중공군 포로 2만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다. 1951년 휴전협상이 시작되면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문제 중 하나가 포로 석방에 관한 것이었다. 유엔은 포로가 돌아갈 국가를 선택하는 자발적 송환원칙을 제시하였으나 북한은 포로의 본국으로 송환하는 강제적 송환 원칙을 고집하였다. 결국 유엔과 북한은 본국 귀환을 거부하는 포로에 한해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송환국을 결정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합의에 불만을 품은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결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거제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나뉘어 다투었고 유혈살상 사건도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1952년에는 수용소 사령관 도드(Francis T. Dodd)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거제포로수용소는 폐쇄되었다. 그 후 1999년 포로수용소 유적관을 개관하고 2002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준공하였다. 그 후 흥남 철수작전 기념 조형물 준공, 1950관 개장, 평화파크, 아파타 포, VR체험관 등을 개장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유적공원은 전쟁존, 포로존, 복원존, 평화존으로 구성되어 있어 당시 포로수용소 생활을 생생하게 재현했는가 하면 평화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설치물들도 볼 수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를 수용한 곳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높아 1983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통영상륙작전지 통영상륙작전지 통영상륙작전지 통영상륙작전지 통영상륙작전지 광복~1950년대 통영상륙작전지 통영상륙작전은 1950년 8월 17일 한국 해병대 김성은 대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통영반도에 최초로 적전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통영을 탈환한 작전이다. 국군은 1950년 8월 중순까지 진동리로부터 낙동강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구축하고 북한의 침공을 저지하고 있었다. 북한군 제6사단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가 여의치 않자 공격 방향을 전환하여 무방비 상태였던 통영지역으로 남하하여 8월 17일 통영을 점령하였다. 통영반도의 점령을 시작으로 북한군 제6사단이 거제까지 진출하자 국군은 거제를 방어하기 위해 국군 해병대 김성은 대대를 긴급 투입하였다. 해병대대는 1950년 8월 17일 새벽 3시 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하였다. 대대는 해군의 엄호 사격 속에 다음 날 아침까지 통영항구 정면에서 육지를 향해 함포사격을 집중하였다. 김성은 부대장은 적의 상황을 파악한 후 거제지역을 방어하는 것보다 오히려 통영반도에 상륙작전을 전개하여 그 일대를 탈환하는 것이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통영 공격작전을 상부에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해병대대는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 함정 및 평택호 등의 지원 엄호 하에 8월 17일 18시 통영반도 동쪽에 기습적으로 상륙하였다. 대대는 고성에서 통영읍으로 진입하는 원문고개를 확보한 뒤 북한군의 진격을 차단했다. 또한 통영일대의 시야가 확보되는 망일봉을 미리 점령하여 8월 19일 10시까지 통영시내 소탕작전을 벌여 북한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통영을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통영 상륙작전은 유엔군의 도움 없이 한국 해병대가 최초로 단독 수행한 상륙작전이자, 지역 탈환 상륙작전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큰 전투이며 유엔군을 방어하기 위한 철수작전 중 유일한 공격작전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6·25전쟁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자, 대한민국 해병대의 위용을 높이는 칭호까지 얻게 된 통영 상륙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2011년 통영상륙작전기념관을 설립하였다.

영산지구전투지 영산지구전투지 영산지구전투지 영산지구전투지 영산지구전투지 광복~1950년대 영산지구전투지 영산지구에서 미 2사단과 북한군 제9사단의 전투에서 북한군을 낙동강선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 전투이다. 영산지구에서 미 제24사단과 해병여단은 1950년 8월 6일에서 8월 19일까지 북한군 제4사단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미 제24사단은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치열한 방어전투를 전개한 끝에 가까스로 북한군의 돌파를 방어하였다. 8월의 공방전에서 분전한 미 제24사단은 8월 24일 영산지구의 방어를 미 제2사단에 인계하고 미 제8군의 예비사단이 되었다. 영산지구의 방어를 인수받은 미 제2사단장 카이저(Lawrence B. Keiser) 소장은 8월 31일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인 낙동강 돌출부에, 제9연대를 창녕 정면에 그리고 제38연대를 그 북쪽 현풍 정면에 각각 배치하였다. 북한군 제2집단은 역시 임무를 교대한 제9사단이 9월 1일 영산지역으로 9월공세를 개시하였다. 북한군 제9사단은 측방 공격으로 미량과 삼량포를 강점하는 동시에 미 제2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다음 대구와 부산 간의 미 제8군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대대적인 공격작전을 감행하였다. 북한군은 야포 2개 대대와 제16전차여단(T-34, 43대)의 집중적인 지원 하에 수차에 걸쳐 돌파를 기도하였다. 미 제2사단의 방어선은 한때 돌파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9월 3일부터 5일까지 과감한 역습을 전개하여 북한군을 타격하였다. 결국 북한군 제9사단은 많은 손실을 입은 채 전선에서 물러났다. 9월 6일부터 9월 15일까지의 전선 상황은 비교적 평온한 상태였으며 크로버 고지(165고지)와 대봉리 고지 사이를 잇는 선에서 미 제2사단은 북한군 제9사단과 서로 가까이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 제2사단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호응하여 9월 16일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미 제9연대 정면 북한군 주력의 거점인 210고지를 공격하여 탈환하였고 이어 낙동강 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9사단은 공격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현재 영산강지구 전투가 있었던 곳에 1979년 영산지구 전적비를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다.

창녕지구전투지 창녕지구전투지 창녕지구전투지 창녕지구전투지 창녕지구전투지 광복~1950년대 창녕지구전투지 창녕지구전투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 돌출부인 창녕-영산 지역에서 미 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4사단과 결전을 벌인 전투이다. 미 제2사단은 1950년 8월 하순 제24사단으로부터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의 부곡리에서 남지까지, 제23연대를 창녕 정면, 그리고 제38연대를 현풍 정면의 강안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진지 편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31일 북한군이 9월 1일 낙동강을 도하하여 공격함으로써 미 제2사단의 작전지역이 돌파되었다. 미 제2사단은 낙동강 동쪽의 오봉리∼주매리·본초리 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이후 미 제2사단 작전지역은 창녕과 영산의 2개 지구로 양단되었고, 북한군 제2·제9의 2개 사단과 대치한 상태에서 반격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창녕 일대에서 9월 15일 미 제2사단장 카이저(Lawrence B. Keiser)는 먼저 낙동강 동쪽지역, 곧 오봉리∼본초리 선에서 저항하는 북한군을 낙동강 서쪽 대안 너머로 격퇴한 다음, 낙동강의 도하지점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차기 작전을 준비하였다. 미 제2사단은 좌에서 우로 제9·제23·제38연대순으로 3개 연대를 병진대형으로 전개하여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공격 첫날 좌일선의 미 제9연대는 사곡산(201고지) 일대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적진을 돌파하지 못하였으나, 중앙 일선인 미 제23연대는 16일 제3대대를 주공으로 하여 주진지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북한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북한군 제4사단은 중대규모의 부대를 후방 창녕까지 침투시켜 교란작전을 전개하였으나, 미 제2사단도 매일같이 정찰을 강화하여 미 제23연대는 창녕지역을 사수하였다.
이 전투를 통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함은 물론 낙동강을 건너 반격할 수 있었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전투였다. 1959년 창녕지구 전승비를 세워 북진의 기틀을 마련한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별장 이승만 대통령 별장 이승만 대통령 별장 이승만 대통령 별장 이승만 대통령 별장 일제강점기(1910~1945) 이승만 대통령 별장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일본군의 통신대 사무실로 사용되던 것을 1945년 해군이 인수하여 대통령 별장으로 수리하여 1949년부터 이용하였다. 건축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1905년 일본이 진해만에 포병요새를 만들 때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군의 통신대 사무실로 사용한 이력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별장 서쪽 해안에 육각형 정자인 육각정이 있는데 1949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타이완 장제스 총통을 초청하여 반공태평양동맹을 결성하기 위한 회의소집에 합의하고 이를 위한 예비회담 개최를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에게 제의하기도 했던 곳이다. 당시 회담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 미군정 장관인 하지 중장, 그리고 초대 국회의장 신익희가 참석하였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건축당시의 원형대로 복원하였고 2013년 내부 보수 공사가 진행되었다. 현재 관리주체는 해군이다. 별장 평면은 ㄱ자모양인데 평면구성은 전면의 ㅡ자형 건물과 후면의 ㅁ자형 건물을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ㄱ자로 되어 있다. 전면에 거실을 내고 커다란 문을 좌우로 달고 좌측에 침실을 들였다. 뒤쪽은 경호실과 회의실, 주방 등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광복 후 개조된 것으로 원래 평면 및 입면구성은 알 수 없다. 남향으로 한식(韓式) 목조집 형식에 양식(洋式)의 외관을 가졌으며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을 한 한(韓)·양(洋) 절충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보인다. 한옥 2채로 이루어진 이 별장의 본관엔 대통령 집무실, 응접실, 침실 등 방 7개가 양식으로 꾸며졌으며 별관은 경호실, 부속실로 사용됐다. 창들은 이중창으로 되어 있고 바닥은 니스칠을 한 나무바닥으로 되어 있으며 별장 안의 침대 및 집기류는 당시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입구부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관계있는 사진첩이 있고 벽면에는 1957년 이 전 대통령이 낚시하던 모습 등 현대사 관련 사진이 걸려있어 이곳의 역사성을 느끼게 한다. 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육각정은 나무로 짜여 있으며, 내부에 응접세트가 있고, 지붕은 갈대로 덮었다. 별장 주변의 정원에 장개석 전 총통이 기념식수한 히말라야시다가 있었는데 2003년 고사되어 후에 다시 식재하였다. 한반도 모양의 연못 가운데는 돌이 놓여 있는데 통일 후에 돌을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별장 아래의 해안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전용 낚시터와 해안부두가 있다.

합천원폭피해자마을 합천원폭피해자마을 합천원폭피해자마을 합천원폭피해자마을 합천원폭피해자마을 일제강점기(1910~1945) 합천원폭피해자마을 합천원폭피해자마을은 1945년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미사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원폭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이 국내로 들어와 합천에서 거주하며 생성된 마을이다. 당시 원폭으로 인해 한국인 중 약 7만 여명이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중 합천 출신이 70% 가량이 된다고 해 합천을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렀다. 피폭된 후 합천으로 돌아온 피해자에 대한 관심과 대책은 사각지대에 있었고 재한원폭피해자에 대한 공식적인 확인이 이루어진 것은 1973년 합천에 원자폭탄피해자 진료소가 생기면서부터이다. 그 후 원폭복지사업소가 1993년에 개소,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1996년 10월에 개관했다. 2011년 8월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실상을 알릴 목적으로 복지회관에서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리기도 했으며, 2017년에는 합천에 국내 첫 원자폭탄자료관을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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